“밀양에서 울다, 밀양에서 견디다” – 전도연의 『밀양』과 함께 걷는 감정의 장소들

 “행복해지고 싶어서 왔는데… 왜 이렇게 괴롭죠?”

전도연이 영화 『밀양』에서 던진 이 말은, 그저 연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실제 삶, 아니 우리 모두의 삶 어느 한 구간을 통째로 집어넣은 듯한 고백처럼 다가온다. 

이창동 감독은 이 고통과 구원 사이를 ‘밀양’이라는 도시 안에 정교하게 펼쳐놓았다. 

한 사람의 감정선이 어떻게 공간을 통해 확장되고 침잠하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 보자.



1. 영남루 – 슬픔을 비추는 거울 같은 곳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요.” – 신애(전도연)

밀양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 그 물결을 바라보며 주인공 신애는 아들을 잃은 후 삶의 방향을 잃는다. 

영남루는 조선 시대 3대 누각 중 하나로, 이 고즈넉한 풍경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신애의 상실과 절망을 담아낸 장면의 무대가 된다. 

그녀가 앉아 있던 강가의 돌계단에 서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느꼈던 고요한 분노와 침묵을 함께 체험하게 된다.

영남루는 지금도 시민들에게는 산책 공간이지만, 『밀양』을 본 이에게는 감정의 강이 흐르는 곳이다.


2. 밀양 시내 골목 – 평범함 안에 숨어 있는 비일상

신애가 피아노 학원을 열고 새롭게 적응해가던 공간은 밀양 시내의 오래된 골목에서 촬영되었다. 

골목의 담벼락, 낡은 간판, 낮게 드리운 전선까지… 이곳은 고통을 딛고 일상을 다시 세워나가려는 한 인간의 내면을 담아낸다.

이 골목들을 걷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나는 과연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되뇌게 된다. 

이창동 감독은 말한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고. 그 말처럼, 밀양의 골목은 ‘살아낸다’는 의미 자체를 품고 있다.


3. 표충사 – 신을 향한 갈망과 거절

밀양시 단장면의 깊은 산 속에 위치한 표충사는 신애가 신앙을 품으려 노력하던 감정적 기점과 맞닿아 있다. 

고요한 전각과 사찰 안의 연못은 삶과 죽음, 구원과 저항의 이중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

신애는 극 중에서 용서라는 신의 섭리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 공간에 와서 그 대사를 떠올려 보면, 그 거부조차도 하나의 신앙처럼 느껴진다. 

믿지 않음으로써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 

표충사의 고요함은 그 아이러니를 조용히 품고 있다.


4. 밀양 아리랑길 – 아픔 위에 걷는 길

밀양은 한국의 대표적인 아리랑 지역 중 하나다. 

밀양 아리랑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리랑 민요 속에 녹아든 이별과 그리움의 정서를 마주하게 된다. 

이 길을 걷는 여행자는 지역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신애가 겪었던 감정의 궤적을 물리적으로 밟게 되는 것이다.

길 끝에 놓인 작은 정자에 앉아 있으면, 그녀가 밀양이라는 공간에 와서 ‘행복해지고 싶었다’고 했던 그 고백이 다시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그 길은 직선이 아니다. 

감정의 곡선처럼, 아픔을 안고 굽이굽이 이어진다.


5. 밀양연극촌(현 밀양아리나) – 감정을 무대로 올리다

『밀양』은 배우 전도연의 연기력을 넘어 감정의 진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밀양연극촌은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실제 연극 예술인들이 모여 매년 ‘밀양공연예술축제’를 열고, 고통을 언어와 몸짓으로 풀어내는 무대가 된다.

전도연이 『밀양』에서 보여준 감정은 연극적인 과잉이 아닌, 삶 자체를 무대에 올린 연기였다. 

연극촌에서 펼쳐지는 연기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감정의 핵심을 찌르는 고요한 폭발.


6. 교도소 면회실 – 구원의 아이러니, 허무의 진실

 “하나님께 용서 받았어요.”

그 말 앞에서 신애는 말이 사라졌다. 눈물도 사라졌다.

『밀양』에서 가장 깊고도 아픈 장면은, 신애가 아들의 납치범을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순간이다. 

극의 중반까지 신애는 용서의 이유를 찾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고, 신 앞에 무릎 꿇는다. 

그러나 면회실 유리창 너머, 죄인은 말한다.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이 말은 마치 신애에게서 용서할 권리마저 빼앗아가는 선언이었다. 

용서는 고통 속에서 겨우 얻어낸 인간적인 힘이지만, 죄인은 그마저도 신의 이름으로 선점해버렸다.

그 순간 신애의 눈빛은 변한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깨닫는다. 

신이란 타인의 용서를 대신해주는 존재일 수 있는가? 그 이후 그녀는 교회를 떠난다. 

믿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신은 이제 그녀의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밀양이라는 도시는 그 면회실을 통해 완전히 전환된다. 

구원이 아닌 허무, 신이 아닌 침묵, 용서가 아닌 사라진 감정의 빈자리가 그녀를 휘감는다.


7. 마무리하며

밀양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다

『밀양』은 한 여성이 고통을 마주하고 용서를 거부하며 끝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삶의 배경이 된 밀양은, 상징으로 소비되기엔 너무나 실제적인 공간이다.

이창동 감독은 말한다.

“한 사람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사회와 철학이 있다.”

그 감정의 깊이를 다룬 배우 전도연, 그리고 그 감정을 품은 도시 밀양. 

이 둘이 만나 만들어낸 이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며 한 번쯤 걸어야 할 감정의 길을 제시한다. 

5월 5일 제61회 백상예술대상에 남녀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전도연배우의 작품중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밀양을 다시 보며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종교적 신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밀양으로 가보자. 전도연의 눈물이 닿았던 돌계단에 앉아, 나만의 감정을 꺼내어 마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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