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 이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복수는 나의 것』은 피와 감정이 뒤엉킨 극단의 폭력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바닥에는 차갑고 정교하게 설계된 ‘사회 구조에 대한 해부학’이 숨어 있다.
그 메시지는 말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진짜 언어는 공간이다.
폐허 같은 공장, 강변의 다리 아래, 병원 복도, 산속 오두막, 그리고 외진 도로. 박찬욱은 이 평범한 공간들에 극단의 감정과 사회 구조를 침전시킨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가 택한 복수’보다 ‘그가 놓인 공간’에 주목해본다.
1. 류가 누나를 위해 장기밀매 조직과 거래하는 장면
🔎장면 요약:
청각장애인 류는 누나의 신장을 구하기 위해 불법 장기밀매 조직에 자신의 신장을 내주지만, 돈도 잃고 신장도 구하지 못합니다.
이 장면은 선한 의도로 시작된 행동이 결국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큰 울림을 줍니다.
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선택은 오히려 더 큰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 장면은 선한 마음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며, 개인의 깊은 고통 앞에서 ‘옳은 일’이나 ‘도덕적 선택’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2. 유괴한 딸을 데리고 시간을 보내는 장면
🔎장면 요약:
류는 실직의 원인이 된 박 사장의 딸을 유괴하지만, 아이를 해치지 않고
정성껏 돌봅니다.
✒의미:
이 장면은 복수와 폭력의 시작을 암시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이와의 ‘잠깐의
평화’를 보여줍니다.
류가 과연 악인인가, 선인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는 단순히 선과 악을 구분하는 대신, 사람과 상황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물수제비를 반복하는 장면은 일시적인 평온을 나타내며, 그 평화가 곧 닥칠 비극과 대조되면서 결국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력하게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3. 아이가 익사하는 장면
🔎장면 요약:
류가 강에서 시체를 묻는 동안, 방치된 아이는 물가에서 익사합니다.
화면은 고요하게 흐르지만, 관객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줍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죽음은 결국 다가오고,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면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강하게 보여줍니다.
✒의미:
이 장면은 감정 없이 비극적인 상황을 그리면서, 죽음이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무심함과 선택이 결국 죽음을 불렀습니다.
4. 류가 여자친구의 시체를 마주하는 장면
🔎장면 요약:
그는 박 사장의 복수로 살해된 여자친구의 시체를 마주하게 된다.
장면은 과장된 음악이나 감정의 폭발 없이, 리유가 텅 빈 눈으로 영미의 죽음을
응시하는 데 그친다.
✒의미:
이 장면은 감정적 격정을 제거한 채, 비극의 종착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이때 류는 분노하거나 울지 않는다.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이 침묵은 오히려 고통보다 더 큰 무게를 준다.
그는 여자친구를 잃었고, 가족도 잃었고, 자신도 거의 무너져 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비극의 완성이 아니라, 존재가 의미를 상실한 절정의 순간이다.
복수의 고리 속에서 그가 지켜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죽음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무력하다.
여기엔 카뮈의 부조리 철학, 특히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 감정을 보이지 않는 장면이 떠오른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과 감정의 연결선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류는 더 이상 복수도, 정의도, 고통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5.박 사장이 류를 추적하여 복수하는 장면
🔎장면 요약:
딸을 잃은 박 사장은 냉정하게 류의 동선을 조사하고, 결국 그를 붙잡아
잔인하게 죽입니다.
✒의미:
죽음을 앞두고도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 장면은,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이르면 슬픔이나 분노조차 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류는 자신이 겪은 상실과 비극 속에서 점점 감정이 마비되고, 마치 살아 있다는 감각마저 흐려지는 듯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 그는 복수도 고통도 모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잠깁니다.
이 장면은 인간 내면의 깊은 공허와, 감정조차 사라진 무거운 현실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마무리하며
각 장면은 사회적 불의, 계급의 격차, 제도의 허술함 같은 구조적 문제를 분명하게 암시합니다.
청년 실업, 의료 불평등, 권력자와 비권력자의 처절한 거리감은 영화 속 인물들의 모든 결정에 배경처럼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그 사회적 배경만을 탓하거나 체제 비판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개인이 겪는 혼란, 불안, 무지, 충동, 그리고 그것이 낳는 선택의
연쇄에 주목합니다.
인물들이 당면한 문제는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내린 결정과 그로 인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입니다.
이 영화에서 ‘복수’는 감정의 분출도, 도덕적 응징도, 통쾌한 결말도
아닙니다.
복수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었던 ‘연쇄적인 반응’일 뿐이며, 그렇게 해서 도달한 종착점은
구원도 정의도 아닌, 철저한 허무입니다.
복수는 이 영화에서 오히려
인간의 무력함과 윤리의 붕괴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제시됩니다.
복수를 통해 어떤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더 파괴되고
망가집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또 다른 사람의 고통이 되고, 그 고통은 다시 또 다른 복수의
이유가 됩니다.
이처럼 무한히 이어지는 고리 속에서, 복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그 결과는
누구에게도 안식을 주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 사실을 냉정하고도 무표정하게 응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