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찬란하고 유쾌했던 그 시절. 그리고 25년 후, 서로를 잊은 채 살아온 인생의 허무 속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
써니는 한 시절을 함께 견디고, 웃고, 울었던 소녀들의 감정을 공간에 새겨놓았다.
영화 '써니'에 담긴 소녀들의 웃음과 눈물이 머물렀던 그 장소들을 따라가며,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우정과 성장의 흔적을 하나씩 되짚어본다.
1. 서울시립대학교 인근 골목 – 낯선 시간의 시작
전학생 나미(심은경/유호정)가 처음 서울에 발을 들이는 장면은 서울시립대학교 인근 골목에서 촬영되었다.
좁고도 복잡한 이 도심의 골목은, 나미에게는 낯선 세계의 입구였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써니'라는 이름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이 골목은 '이방인'으로 시작한 나미가 점차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심리적 경계를 상징한다.
낯설음이 익숙함이 되는 순간, 장소는 더 이상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풍경이 된다.
2. 덕수궁 돌담길 – 첫사랑의 감정이 흐르던 길
수줍은 나미의 마음을 간질였던 준호와의 만남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이뤄진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길, 그리고 나미 혼자만의 속마음이 조용히 흘렀던 돌담길.
도심 한복판을 걷는 장면이지만, 관객은 그 길 위에 소녀의 미묘한 설렘과 좌절을 함께 본다.
덕수궁 돌담길은 오랜 세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였지만, 써니 속에서는 말하지 못한 사랑과 외면당한 감정의 조용한 풍경으로 남는다.
돌담길을 걷는 나미의 모습은 '하지 못한 말'과 '지나간 기회'의 은유처럼 아프면서도 따뜻하다.
3. 가평 북한강변 –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써니’
성인이 된 나미(유호정)가 한 명씩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마침내 다시 모인 써니.
그들이 함께 모여 앉아 과거를 회상하고 웃고 우는 장면은 경기 가평의 북한강변에서 촬영되었다.
북한강의 흐름 위에, 흐르지 않았던 감정들이 다시 피어난다.
서로를 잊은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던 마음.
이 물가에서 친구들은 그 시절 자신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관객도 깨닫게 된다.
"시간은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의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다."
이 장면은 써니 전체의 정서가 응축된 순간이다.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이지만, 그 안에 우리가 흘려보낸 웃음과 눈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4. 충무로 극장가 – 영화처럼 지나간 우리의 청춘
극 중 나미는 충무로의 오래된 극장을 찾는다.
이 장면은 지금은 사라져가는 80년대식 단관극장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낡은 의자, 희미한 조명, 그리고 벽에 붙은 오래된 영화 포스터.
이곳은 나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감정의 스크린'이다.
스크린에 비치는 건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삶이다.
젊은 시절 좋아했던 노래가 흐르고, 친구들과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충무로 극장가는 영화 속 인물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너의 삶도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듯하다.
1) 충무로 극장가 – 청춘의 서사시가 상영되던 곳, 그리고 오늘의 시간
⬛ 잊힌 단관극장의 추억 – 영화보다 더 영화 같던 풍경
영화 속 극장은 화려하지 않다.
낡은 의자, 벽에 희미하게 남은 영화 포스터, 탁한 조명 아래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하지만 바로 그 ‘낡음’이야말로 과거의 우리가 앉아 있었던 청춘의 좌석이었고, 설레며 스크린을 바라보던 감정의 무대였다.
충무로 극장가에서 상영되던 영화는 상업적인 오락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과 정체성, 갈등과 욕망이 투영된 서사시였다.
누군가는 그 극장 안에서 첫사랑의 손을 잡았고, 누군가는 인생의 전환점을 만났다.
그렇게 충무로의 영화관은 스크린보다 더 커다란 인생의 거울이 되었다.
✔단관극장: 하나의 상영관 만을 갖춘 영화관
⬛ 현실의 충무로 – 사라진 것과 남은 것
2025년의 충무로는 더 이상 영화 제작소나 단관극장의 중심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골목 곳곳에는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근처에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선 복원된 고전 영화와 예술영화를 상영하며 여전히 충무로의 ‘영화적 영혼’을 이어가고 있다.
⬛ 청춘의 산책길 – 충무로에서 시작해 을지로까지
충무로역(서울지하철 3호선, 4호선) 인근에는 영화적 감성을 간직한 산책 코스도 존재한다.
남산 쪽으로는 필동 문화예술거리가, 반대편으로는 최근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을지로 3가 인쇄골목이 이어진다.
옛 극장 간판이 남아 있는 벽화길과, 영화 포스터를 컨셉으로 꾸며진 카페와 소극장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충무로 일대는 사라진 것만으로 가득한 ‘유령 도시’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건너온 감정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기억의 거리다.
오래된 필름처럼 빛바랜 공간에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청춘을 마주할 수 있다.
⬛ “삶은 영화처럼 반짝이지 않지만” – 그리고 우리는 걸어간다
영화 <써니> 속 충무로 극장은 나미가 자신의 과거와, 친구들과의 시간을 조용히 마주하는 장소다.
세월 앞에선 누구나 작아지지만, 잊지 않고 다시 꺼내본 기억은 곧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충무로에서 나미는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현재를 견딜 수 있는 감정의 무게중심을 되찾는다.
그녀가 앉았던 극장의 의자, 그녀가 지나간 골목, 그녀가 바라본 스크린. 그 모든 것들은 비록 사라졌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분명히 존재했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서사시였다.
2)🌟 충무로에서 가볼 만한 명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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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종로구 돈화문로 13 – 복원 영화 상영, 한국영상자료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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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예술거리: 충무로역 3번 출구 인근 – 문화예술 벽화길과 공연장 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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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3가 인쇄골목 카페: 낡은 인쇄소를 리모델링한 복고풍 카페 다수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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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한옥마을: 도보 10~15분 거리 – 서울의 전통과 현대 감성이 공존하는 공간
5. 우리는 여전히 써니였다
향락적인 조명도, 무대도 없는 장례식장.
하지만 그곳은 그 어떤 콘서트보다 뜨겁고 눈부셨다.
세월은 흘러 주름지고 아픈 몸이 되었어도, 음악이 흐르자 소녀들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춘자의 유언처럼, 슬픔보다는 웃음으로, 눈물보다는 리듬으로 보내는 마지막 인사.
춤을 추는 그들의 눈빛 속에는 한 치의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다시 '써니'였다.
잊지 않겠다는 말 대신,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춘자를, 그리고 자신들의 찬란했던 시간을 환하게 배웅했다.
6. 맺으며 – 장소는 기억을 담고, 감정은 장소에 남는다
써니는 시간의 영화이자, 장소의 영화다.
특정한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공간에 새겨진다.
서울의 골목, 덕수궁 돌담길, 순천의 오래된 거리, 가평의 강가, 충무로의 극장.
이 장소들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선이 흐르고 성장의 흔적이 남은 풍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거리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써니’가 되어, 그들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을.
장소는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를 품고, 영화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