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 7년 전 기억을 찾아 떠난 낯선 여행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는 옛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이 우연히 찻집 여주인 공윤희(신민아)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7년 전 기억 속 춘화가 걸려 있던 찻집을 찾아간 최현은 그곳에서 공윤희를 만나게 되고, 낯선 두 사람은 경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미묘한 감정을 공유합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한 편의 시처럼 낭만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경주라는 도시가 주는 고즈넉한 정취와 함께,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감성적인 작품입니다.


1. "형 그때 기억나. 7년전 경주 갔을 때? 그때 내가 창희영 찍어 준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되버렸네..."

친구(창희)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 그리고 7년 전 경주에서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최현(박해일)은 왠지 모를 이끌림에 홀로 경주로 향한다. 그의 낯선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장률 감독이 선보이는 이 영화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한 남자의 내면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2. " 어떻게 황차를 찾으세요?. -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나 봐요?." - " 황차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죠." - 첫 만남

낡은 찻집 안, 최현(박해일)은 낯선 여인 공윤희(신민아)와 마주 앉습니다. 

황차가 담긴 잔을 앞에 두고 호기심 어린 그녀의 질문이 먼저 다가옵니다. "어떻게 황차를 찾으세요?". 

최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나 봐요?"라고 되묻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황차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죠"라고 답합니다.

흔하지 않은 황차라는 매개체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를 감돌게 합니다

복잡한 말 대신, 은은한 차 향기처럼 퍼져나가는 대화는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며 조심스러운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마치 잊고 지냈던 오랜 인연을 만난 것처럼, 황차 한 잔이 만들어낸 고요한 순간은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한 아련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3. "선배, 나 그 때 임신 했었어요." "너 왜 얘기 안했어?". "선배 잘 책임 안지잖아" 

후배 여정과의 만남.

그러나 뜻밖의 말을 듣는 순간, 최현(박해일)은 잊고 지냈던 지난날의 잔영과 마주합니다.  

무심하게 툴툴거리는 후배 여정(신소율)의 태도 속에서 최현은 알지 못했던 과거의 무게를 느낍니다. 

"선배, 나 그때 임신 했었어요."라는 그녀의 말은 고요했던 최현의 마음에 깊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어진 "선배, 책임 잘 안 지잖아요."라는 그녀의 아련한 말.  

그리고 "모든 것은 다 지워야 해 !" 라는 단호와 말과 함께 삭제되는 사진들.... 지나간 시간이 반드시 따뜻한 추억만은 아니었음을, 

그의 무심함이 남긴 아픔이 여정의 마음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4. "그 죽음은 스스로 결정 한 거에요. 하지만 자살은 아니예요. 고승들은 죽음의 날을 스스로 정한다고 하잖아요. 이해하죠?. 이해 해 주실 꺼죠?" - 최현의 상상

최현이 형수와 나누는 이 상상속의 대화는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드러냅니다.

그는 자살과 달리 고승처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는 바람을 상상 속 대화를 통해 표현합니다. 

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깊은 자기 성찰의 발로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유한함 속에서 의미를 찾고, 죽음마저도 고결하고 평화로운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의 철학적인 태도가 상상을 통해 잔잔하게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고뇌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화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5. 북경대교수=조선족=최고의 석학=변태. 난장이 똥자루, 대머리

영화 《경주》 속 여정의 지인과의 술자리는, 한 사람을 둘러싼 무수한 선입견과 편견을 섬세하게 펼쳐냅니다. 

북경대 최고 석학이라는 찬사는 그에게 존경의 무게를 더하지만, '조선족', '난쟁이 똥자루', '대머리', '변태'라는 단어들은 끊임없이 그 이미지를 흐트러뜨립니다.

이는 한 사람의 본질을 보려 하기보다 직업이라는 껍데기와 외모, 출신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로 그를 재단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좋은 대접을 받지만, 동시에 그를 향한 차별적인 시선들은 한없이 가벼워지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현은 이 상반된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타인을 향한 우리의 편협한 시선을 잔잔하게 일깨웁니다.


6.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여정의 집에서 발견된 그림 속 문구는, 세상의 소란이 잦아든 뒤 찾아오는 고요한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사람들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초승달은 외로움보다는 은은한 위안을 건네고, 물처럼 맑아진 하늘은 삶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얻게 되는 맑고 깨끗한 깨달음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 문구를 되뇌는 여정의 마음속에는 남편의 죽음이 남긴 슬픔과 함께, 모든 것을 초월한 평온함과 잔잔한 그리움이 함께 피어납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닌, 또 다른 고요한 풍경의 시작임을 이야기하는 서정적인 시처럼 느껴집니다.


7. " 그... 남편 분은 어쩌다가..." "자살이요. 우울증 때문에". " "최교수님은 남편과 귀가 똑같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만져보니 다르네요"

여정의 내면은 남편의 자살이라는 잔잔한 물결 아래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진 고요 속에서, 그녀는 마치 깨어진 조각배처럼 표류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파도가 휩쓸고 간 해변의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일이었죠.

그런 그녀의 삶에, 최교수라는 작은 섬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의 따스한 시선과 조용한 배려는, 거친 파도에 깎여나간 여정의 마음에 한 줄기 햇살처럼 드리웠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 법. 

그 햇살을 향해 한 발 내딛고 싶어도, 과거라는 거대한 그림자는 그녀의 발목을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살짝 열어둔 방문. 그것은 여정의 내면이 보내는 가장 솔직한 신호였습니다. 

스스로 다가갈 용기는 없었지만, 혹시나 그가 이 미약한 빛을 보고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이었습니다. 

최현의 선택은?. 그리고 이 여행의 끝은....


8. 마무리하며

영화 '경주'는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한 잔잔한 정서의 작품입니다. 

특별한 사건이나 강렬한 드라마 대신, 경주의 아름답고 쓸쓸한 풍경 속에서 주인공의 미묘한 심리와 과거의 흔적들이 조용히 교차하죠.

이 영화는 삶과 죽음, 그리고 관계에 대한 사유를 묵묵히 이어갑니다. 

잊고 지냈던 기억과 상실의 의미를 잔잔하게 일깨우며, 관객에게 많은 것을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그 순간의 공기와 감정을 느끼도록 초대합니다. 

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고즈넉해지는,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9. 영화속 등장하는 찻집

영화 '경주'의 찻집 촬영 장소는 경주에 있는 '능포다원'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아리솔'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죠.

이곳은 영화의 모티브가 된 춘화(春畵)를 장률 감독이 실제로 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심오해', '아사가'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현재는 '아리따운 소나무처럼 마음이 늘 푸르다'는 의미를 담은 '아리솔'로 운영되다가, 이후 능포다원이 그 자리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배우 배용준 씨의 책에 소개된 후로는 일본 관광객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곳이라고 하네요.

주소: 경주시 원효로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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