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여행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듭니다. 바람은 거칠고, 바다는 맑고, 돌담 사이로 핀 들꽃은 소박하지만 강인합니다.
그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웃고, 때로는 울며 살아갑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그런 제주를 배경으로, 삶의 쓴맛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냈습니다.
그저 ‘예쁜 풍경’으로만 제주를 본다면, 이 드라마의 절반은 놓치는 셈입니다.
오늘은 우리들의 블루스 속 주요 촬영지를 따라 걸으며, 그 장소들이 품고 있는 지리적·역사적 의미, 그리고 삶과 감정이 스며든 명대사들을 되새겨보려 합니다.
감독의 시선과 배우의 감정, 그리고 제주의 시간들이 만나는 그곳. 지금, 함께 떠나보시겠어요?
1. 세화 오일장 — 삶이 모이고 흘러가는 사람들의 시간
등장 인물: 정은희(이정은), 고미란(엄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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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미란아, 넌 참 변함이 없다. 그래서 더 그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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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포인트: 5일마다 열리는 전통시장 / 해변과 이어지는 산책로 / 감성카페 밀집
세화 오일장은 제주 동쪽에 위치한 작은 해변 마을 세화리에서 열리는 재래시장입니다.
시장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닷일과 농사일을 병행하던 제주 여성들의 삶의 터전이었죠.
드라마 속 은희와 미란의 관계는 이 시장처럼 질기고 복잡합니다.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는 오랜 친구지만, 그만큼 깊은 상처도 남겨진 사이.
세화 오일장에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시장의 북적임 속에서 조용히 자신들의 감정을 꺼내놓습니다.
이곳을 걷다 보면, 삶은 결국 크고 작은 타협과 용서의 연속임을 느끼게 됩니다.
2. 함덕 해수욕장 — 사랑과 후회의 바다
등장 인물: 최한수(차승원), 정은희(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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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넌, 참 좋았던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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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포인트: 야자수길 / 밤바다 노을 / 해변 카페 델문도 / 서핑 체험
함덕은 조선 시대 제주목 관아의 ‘방어선’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제주 북부 해안 중에서도 비교적 완만하고 넓은 해안을 가진 함덕은 어민들에게는 생업의 터전이었고, 육지와 연결되기 전 제주인의 고립된 감정이 가장 처음 닿는 바다였습니다.
드라마에서 한수와 은희가 바닷가를 걸으며 나누는 대화는 마치 지난 감정의 결산서처럼 담담하지만 묵직합니다.
바다는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침묵으로 그들을 감쌉니다.
이곳은 과거의 사랑을 품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공간입니다.
3. 월정리 해안도로 — 청춘의 회피와 직면 사이
등장 인물: 방영주(노윤서), 정현(배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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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우린 아직 어리니까… 많이 흔들려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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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포인트: 해변 자전거 코스 / 감성 카페 / 해변 리조트
월정리는 제주 동부 해안 중에서도 유난히 바람이 세고, 파도가 아름답습니다.
예전엔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청춘들이 찾는 핫플레이스로 변모했죠.
이곳을 배경으로 영주와 현은 미숙함과 불안을 안고 서로에게 기대기도, 밀어내기도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마치 불안한 청춘이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그려냅니다.
하지만 제주 바다는 도망치는 이들에게조차 따뜻한 품처럼 열려 있습니다.
이 공간은 흔들려도 괜찮다고, 어리기에 실수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4. 하도리 해녀촌 — 깊은 물속에서 꺼내는 진심
등장 인물: 이영옥(한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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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물속은 고요해. 그 안에선 나 혼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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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포인트: 해녀 체험관 / 해녀 박물관 / 실제 해녀 작업장
하도리는 제주 동북 해안에 자리한 오래된 해녀 마을입니다.
제주 해녀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으며, 한국 여성 공동체 문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영옥은 도시에서 온 간호사, 낯선 얼굴입니다.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시작하고, 차가운 바다에 온몸을 던지는 순간, 편견과 경계는 점차 녹아듭니다.
이곳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공간입니다.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5. 곽지과물해변 — 떠난 자와 남은 자
등장 인물: 정인권(박지환), 방호식(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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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사람이 떠난 자리에, 바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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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포인트: 천연 용천수 ‘과물탕’ / 조용한 소규모 해변 / 가족 여행지
곽지는 제주시 외곽에 위치한 소박한 해변입니다.
해수욕장 한가운데 솟는 민물 ‘과물탕’은 제주 자연의 독특한 지질 구조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드라마에서 이곳은 이별의 공간으로 등장합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강력한 부재가 남긴 자들을 시험합니다.
곽지의 파도는 높지 않지만, 마음을 덮는 데는 충분합니다. 여유롭게, 조용하게, 그리고 깊이.
6. 조천읍 유채꽃밭과 김혜자의 집 — 기억과 사랑의 마지막 풍경
등장 인물: 강옥동(김혜자), 이동석(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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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이 꽃이 예쁘다는 건 아직도 기억나네. 이 꽃이 너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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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포인트: 유채꽃 명소 / 드라마 촬영지 포토존 / 가족 단위 관광객 인기
조천읍은 제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마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조천진성’이 설치되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 요충지였고, 지금은 감귤과 유채꽃으로 유명한 평화로운 마을이죠.
드라마에서 옥동은 치매로 점차 기억을 잃어가지만, 꽃과 아들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선명합니다.
김혜자의 눈빛과 대사는 그 자체로 제주 자연의 품처럼 포근합니다. 유채꽃밭은 단지 아름다운 배경이 아니라, ‘남겨진 기억’과 ‘전달된 사랑’의 상징입니다.
7. 제주, 상처를 껴안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섬
제주는 유배지였습니다.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이 이 섬으로 유배를 왔고, 그들은 바람과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지금도 제주는 여전히 유배지입니다. 다만 현대의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이곳으로 ‘감정을 유배’시키러 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바로 그 제주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감정들을 다시 꺼내 보게 합니다.
상처, 미움, 후회, 용서, 사랑… 그 모든 것을 제주라는 공간이 조용히 품어줍니다.
“아픈 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 말이 더는 절망이 아닌 위로처럼 느껴진다면, 지금 제주의 바다로 떠나보세요.
당신의 블루스도 언젠가는 따뜻한 리듬으로 바뀔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