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살인의 추억》, 그리고 그 풍경: 화성과 한국의 기억을 걷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은 인간의 본능, 사회의 무능, 시대의 공기를 흡수한 채 1980년대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국 사회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영화의 배경이 된 경기도 화성을 포함해, 촬영에 사용된 실제 국내 지명들은 로케이션을 넘어 기억의 지도로 기능한다.

그곳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시대의 침묵이 새겨진 상처의 현장이다.

1.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 사건의 중심이자 한국적 풍경의 압축

📍 촬영지: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 논밭과 농로

🎥 장면: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는 장면, 형사들이 수사하는 시골길

화성의 풍경은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섬뜩하다.

조용한 논밭과 흙길, 그곳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은 ‘악’이 반드시 도시에서만 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비 오는 날만 골라서 죽인 게 아녀. 비 오는 날밖에 없으니까.” – 박두만

이 말은 그저 비극의 원인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시대, 단조로운 시골의 일상 속에 숨어든 참혹한 무력감과 구조적 폭력을 말한다.

화성은 대한민국의 주변부, 즉 시스템이 도달하지 못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책임이 흐려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2.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 경찰서 외부와 마을 촬영지

📍 촬영지: 충북 청주시 부용외천 일대

🎥 장면: 박두만 형사가 마을을 누비며 주민을 조사하는 장면, 형사들이 동네를 순찰하며 피해자의 흔적을 좇는 장면

이곳은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골목과 집들’의 배경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무기력하거나 침묵하며, 때로는 스스로 범인을 지목하기도 한다. 혼란과 불신이 일상화된 공간.

“그냥 느낌이야. 눈빛이 이상하잖아.”

감정이 진실을 대신하고, 직감이 논리를 덮는다.

사람을 보는 시선이 곧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회는 언제든지 폭력을 허용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사건보다 더 위험한 ‘의심’이 번지는 구조를 상징한다.

인간은 때때로, 진실보다 불안을 선택한다.

3. 전라북도 전주시 – 기차역과 철길 장면

📍 촬영지: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일대

🎥 장면: 철길을 걷는 형사

기차와 철로는 영화 전반에 걸쳐 ‘시간’과 ‘불가역적 기억’을 의미하는 오브제로 반복된다.

증거를 찾기엔 너무 늦은 순간, 흐르는 기차는 우리가 지나친 것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암시한다.

“시간이 좀 지나야 보이는 것도 있어.” – 서태윤 형사

송천동의 철로는 '지나간 진실'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죄책감'을 의미한다.

지나갔지만 끝나지 않은 사건.

그래서 기억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4. 진주 죽봉터널 – 마지막 터널

📍 촬영지: 경남 진주시 정촌면 화개길 194번길 121

🎥 장면: 영화 후반부, 진범을 특정하지 못한 채 수사는 교착 상태에 빠지고, 박두만 형사는 마지막 용의자와 마주한 순간 더는 과거처럼 폭력에 기대지도, 확신할 수도 없는 무력한 자신을 마주합니다.

비 오는 날의 터널, 그리고 그의 발걸음.

카메라는 평범한 터널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과거를 마주한다기보다,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과 마주한다.

“밥은… 먹고 다니냐?” – 박두만

이 말은 그 자체로 인간적이다.

범인을 향한 저주도, 분노도 아닌, 삶에 대한 질문이다.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 자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일 수 있다는 것.

터널은 기억과 망각, 과거와 현재 사이의 문.

박두만은 터널 안에서 그와 마주친다.

그리고 우리가 잊은 채 살아온 질문을 던진다 – 범죄는 잊혀졌는가, 아니면 우리는 모른 척하고 있는가?

5.기억은 공간에 머무른다

《살인의 추억》은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무기력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철저히 탐구하는 복합적인 서사로, 한 인간이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상처를 입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미비한 경찰 수사 기법과 불완전한 사회적 시스템은 이 영화를 통해 비판받으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고통을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영화 속의 화성, 그 논길과 터널은 죽음을 뒤쫓는 형사들의 발자국이 찍힌, 한 시대의 고통과 기억을 간직한 장소로 존재한다.

이러한 장소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사람들에게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가 그려낸 감정선은 픽션에 그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 시절의 '미제 사건'은 과거의 일일 뿐일까, 아니면 여전히 사회의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을까?

지금 그 길을 다시 걷는다면, 우리는 영화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을 걸으며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화성의 논길과 터널은 이제 사건의 배경을 넘어,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억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이 장소들에서 우리는 한 시대의 치명적인 상처를 다시금 목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