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이 짧은 대사는 『기생충』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품고 있다.
극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위를 바라보지만, 보이지 않는 경계는 그들을 가로막는다.
무언가를 계획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
봉준호 감독은 그 경계를 눈에 보이지 않게 쌓아 올린다.
계단과 높낮이, 빛과 어둠, 그리고 사람들의 걸음과 시선이 이를 설명한다.
송강호와 이선균은 서로 다른 높이에서 살아가며, 겉으로는 조우하지만 결코 섞일 수 없다.
그들의 말투, 움직임, 그리고 머무는 자리마다 계급의 냉기가 서려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의 본능은 때로는 비루하고, 때로는 안타깝게 고개를 든다.
『기생충』은 그래서 잔혹하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과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1. 자하문 터널 계단 – ‘내려가는’ 삶을 걷다
촬영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7길
기택(송강호) 가족이 박 사장(이선균)의 저택에서 도망친 밤.
쏟아지는 폭우 속에 이어지는 긴 계단 장면은 ‘지상에서 지하로’, ‘부에서 빈으로’ 내려가는 여정을 상징한다.
“비는 축복이죠.” – 박 사장의 말은, 누군가에겐 재앙이 된 그 밤을 모른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 현실은 언제나 계획을 비웃는다.
이곳은 서울의 평범한 골목이지만, 이 계단을 걸으며 우리는 ‘사회적 위치’를 체감하게 된다.
그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아닌, 불평등이 구조화된 공간의 수직성을 몸으로 느끼는 장소다.
바로 이 장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말 없는 언어로 우리에게 묻는다.
누구의 삶은 왜 항상 내려가야만 하는가.
우리가 오르려는 계단은 정말 같은 높이에서 시작되는가.
기택 가족이 물에 잠긴 반지하로 돌아갈 때, 그들의 발걸음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귀환이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는 그렇게, 사람들의 꿈을 향한 방향을 계절과 날씨처럼 무심하게 뒤틀어 놓는다.
2. 박 사장네 집 세트장 – 고요한 배제의 미학
촬영지: 경기도 양주 세트장 (현재 철거)
모던한 외관, 정원, 통유리창.
박 사장 가족이 사는 이 집은 절제된 감각으로 디자인된 고급 주택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 내부에서 타인을 감시하고 구분 짓는 시선을 강조한다.
“선을 넘지 않으시잖아요.” – 박 사장의 말은 무의식적 계급 경계를 드러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경계와 침묵의 구조가 존재한다.
“냄새가... 지하철 냄새야.”
송강호는 이선균과 대화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 공간은 단지 부의 상징이 아니라, 권력의 정적 표현이자 누구는 벽 뒤에 숨고, 누구는 정원에서 와인을 마시는 사회적 위치의 무대다.
3. 기택네 반지하 – 젖은 일상 속 존엄
촬영지: 서울 마포구 아현동 일대 (실제 반지하)
좁고 습한 공간, 창밖엔 누군가의 다리만 보이는 일상.
하지만 이곳은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웃던, 작지만 온기가 있는 세계였다.
폭우가 내리고, 집이 잠기고, 변기가 역류하는 순간에도 기택은 가족을 챙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행위로 감정을 보여준다.
“여긴 반지하야. 그래도 반이 지상이지 않냐.”
“걱정 마. 아빠가 다 계획이 있지.”
이 공간은 단순한 비극의 배경이 아니라, 기택 가족이 매일을 살아낸 생존의 현장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보여준 유머와 버티는 힘은 가난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의 기록이다.
4. 지하실 – 더 아래에도 사람이 있다
촬영지: 세트장 내 비밀공간 (세트 해체됨)
박 사장의 집 아래 숨겨진 지하실.
그곳에 문광의 남편 근세가 수년간 숨어 살고 있었다는 설정은 단순한 반전이 아닌, 사회 구조 아래 또 다른 지하가 있음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그 남자는 지하실에서 오래 살았어요. 아무도 몰랐죠.”
“당신 아들 생일에 나왔던 그 귀신… 그게 우리 남편이에요.”
우리는 ‘아래’에 살던 기택조차 더 ‘아래’에 있는 존재를 두려워하고 배제한다.
기택의 마지막 독백은, ‘존재로 무시당한 인간’의 절망을 드러낸다.
이 공간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지점이다.
결국, 가장 억눌린 자가 폭력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계획이 아니라 억압된 인간 본능의 폭발이다.
“그냥… 그때 그 사람이… 날 그렇게 보는데…”
5. 마무리하며
‘기생충’ – 장소로 읽는 사회와 존재
『기생충』은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공간으로 완성되는 영화다.
서울 곳곳의 계단, 반지하, 정원, 지하실은 봉준호 감독이 설계한 계급의 지도이자 송강호와 이선균이 교차하며 체현한 현대 한국 사회의 초상화다.
이 공간들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단지 영화의 흔적을 더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위치, 눈높이, 생활의 깊이를 다시 묻는 행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가 아들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관객은 알고 있다.”
– 봉준호 감독
『기생충』은 현실을 그린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현실은 지금 이 도시, 이 계단과 반지하 속에도 여전히 존재한다.